하루에도 수십 건의 진료와 수술, 보호자 상담이 이어지는 동물병원 현장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물론 첨단 장비와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아픈 반려동물을 돌보고, 보호자와 소통하는 일은 수의사와 테크니션, 간호·리셉션 스태프의 손끝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장시간 근무와 교대 공백, 감정노동이 반복되면 직원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이는 병원의 분위기와 서비스 품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제 동물병원은 ‘환자를 잘 보는 병원’을 넘어 사람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조직, 즉 ‘사람 중심 병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번아웃 원인 | 보상과 휴식의 불균형
2024년 수의학 학술지 JAVMA 연구에 따르면, 수의임상 의료진의 60% 이상이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높은 업무 강도와 장시간 근무, 보호자 응대로 인한 감정적 피로가 주된 원인이었다.
단순히 일이 과중해서 힘든 것이 아니라 근무 구조를 통제할 수 없거나 업무 분배가 불균형 할 때 팀워크와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분석이었다.
국내 의료기관 대상 조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확인된다. 대학병원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서는 조직문화와 일·생활 균형 수준이 병원의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분석됐다. 서로 조직이 안정적이고 보상이 공정하며,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된 병원일수록 업무 집중도와 만족도가 높았고, 이직률은 낮았다.
한 동물병원 원장은 “직원들이 만족하며 오래 다닐 수 있는 근무 환경이 충족돼야 보호자 만족으로도 이어진다”며 “직원의 행복도가 곧 병원의 서비스 품질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결국 병원의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에서 시작된다.
번아웃 막는 해법 | 휴식과 공정성의 제도화
번아웃을 줄이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휴식권을 보장해야 한다. 최소한의 휴식시간과 연속 근무 상한을 정하고, 갑작스러운 결원에 대응할 수 있는 대체 인력 풀을 마련해야 한다.
병원은 진료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구성원의 체력과 집중력이 무너지면 결국 환자 안전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보상은 공정해야 한다. 같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업무의 강도와 책임은 다르다. 역할과 숙련도, 야간·응급 근무 등 다양한 요소를 세분화해 급여에 반영하고, 성과에 대한 보상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공정한 보상 체계는 구성원에게 내 노력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마지막으로 업무량을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진료와 수술뿐만 아니라 보호자 상담, 전화 응대, 기록 정리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업무까지 모두 공식적인 업무 시간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력 배치와 스케줄을 조정하면 과로를 객관적으로 줄일 수 있다.
배우는 조직 | 성장하는 사람
많은 동물병원들이 여전히 즉시 투입 가능한 인력을 선호한다. 하지만 병원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짓는 것은 함께 성장할 인력을 얼마나 길러내느냐다. 수의사와 스태프가 자신의 역할을 배우고 확장할 수 있는 교육 체계가 없다면 병원은 쉽게 정체된다.
최근 일부 병원은 경력개발경로(CDP, Career Development Path)를 도입해 직원의 성장 단계를 체계적으로 설계하고 있다.
임상 영역뿐 아니라 고객 커뮤니케이션, 안전관리, 병원 운영까지 세분화된 트랙을 설정해 교육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저 업무를 수행하는 인력을 넘어 병원의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는 동료로 키우는 과정이다.
한 동물병원 원장은 “직원들의 역량에 따라 환자가 병원을 선택하거나 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그만큼 직원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내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교육 기회가 충분한 병원’은 그렇지 않은 병원보다 직무 만족도가 30% 이상 높고, 이직 의사는 절반 이하로 낮았다. 교육이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인력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결국 병원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이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곳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사람의 성장이 멈추지 않아야 조직의 성장도 함께 한다.
소통이 만든 신뢰 | 존중이 만든 팀워크
동물병원은 여러 직종이 동시에 움직이기에 작은 오해나 전달 착오 없이 얼마나 잘 소통하는지 내부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서울의 한 동물병원은 매일 오전·오후 진료 사이에 하프타임 미팅을 통해 단 10분이지만 전 직원이 참여해 당일 스케줄과 응급 케이스 및 환자 상태를 공유한다.
병원 관계자는 “짧은 회의지만 이 시간을 통해 서로의 역할을 다시 확인하고, 실수가 줄었다”고 말했다.
실제 동물병원을 대상으로 한 안전 연구에서도 팀 간 의사소통과 환자 안전의식이 높은 조직일수록 오류 발생률이 낮다는 결과가 보고됐다. 특히 병원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자리잡아야 한다. 문제를 제기해도 비난하지 않고 의견을 존중하는 조직일 때 의료의 질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
동물병원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만큼 인력의 피로도도 커지고 있다. 병원의 미래를 바꾸는 것은 새로운 장비나 화려한 인테리어가 아니라 매일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병원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