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일 원장 칼럼] 동물병원에서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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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일 원장 칼럼] 동물병원에서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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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10호] 승인 2025.12.2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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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공공 동물의료체계 구축 필요

반려동물은 이제 많은 가정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고, 보호자들은 그에 걸맞은 의료 서비스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여러 조사에서 보호자의 80% 이상이 진료비 부담을 가장 큰 고민으로 꼽고 있으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미루거나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다.

보험 가입률은 1.7% 수준으로 낮고, 진료비는 100% 보호자가 직접 부담해야 한다. 이 구조적 요인들이 겹치면서 질병을 치료받지 못하는 동물이 늘어나고, 치료가 필요한 순간조차 병원 문을 쉽게 넘지 못하는 보호자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부 지자체는 공공동물병원을 세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취약계층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목표 자체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공공병원이 과연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병원을 새로 짓는 방식은 많은 예산과 시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지역마다 이미 민간 동물병원이 촘촘하게 존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구조와도 잘 맞지 않는다. 실제로 공공병원은 새로운 ‘의료 공급자’ 역할을 맡기보다는, 민간 인프라를 위축시키거나 예산 대비 낮은 효과에 그치고 있다.

반면 해외 여러 국가들은 이미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미국 AVCC, AlignCare, 영국 PDSA, Blue Cross, 네덜란드의 커뮤니티 기반 모델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철학을 공유한다. 반려동물 의료 문제는 새로운 병원을 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기존에 넓고 촘촘하게 형성된 민간의료 인프라를 활용하면서, 그 위에 공공적 기능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접근성을 높인다. 미국에서는 취약계층을 사회복지 체계와 연계해 파트너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하였고, 영국의 비영리 네트워크는 기부, 유증, 리테일 수익 등을 활용해 저소득층 진료를 지속해왔다. 핵심은 병원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병원들을 서로 연결해 하나의 공공적 서비스 체계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이러한 접근이 더욱 적합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민간 동물병원이 생활권 단위까지 깊이 자리 잡고 있어 접근성 자체는 매우 높다. 문제는 비용 부담 때문에 병원 문을 넘지 못하는 보호자들인데, 이를 해결하는 방식이 병원을 추가로 짓는 것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존 병원을 공공,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파트너로 참여시키고, 취약계층이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는 방식이 더 합리적이고 지속가능하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바우처 기반 지원’이다. 바우처 제도는 소득수준에 따라 대상자를 선별하고, 지정된 동물병원에서 일정 비율의 비용을 지원받도록 하는 방법이다.

본인부담을 일정 부분 유지함으로써 과잉 이용을 방지하고, 예방·중증 내과·외과·응급 등 필수의료 중심으로 범위를 제한해 예산의 효율성을 높인다. 또한 참여 병원은 일정 기준을 충족한 민간 병원을 활용하기 때문에 이미 검증된 인력과 장비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진료가 가능하다. 복지기관이 대상자를 발굴하고 동물병원이 진료를 맡으며, 지자체가 이를 조정하는 구조는 서로의 강점을 살리면서 공공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충족한다.

이러한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면 여러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던 보호자들이 필요한 시점에 병원을 찾게 되고, 미치료 동물 수가 줄어든다. 민간병원은 새로운 환자층을 확보해 경영 안정성이 높아진다. 지자체는 보호소 운영비나 민원 대응 비용 등 사후적 비용을 줄이고, 예산을 보다 계획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즉, 취약계층, 수의사, 지자체 모두가 이득을 얻는 구조가 형성된다.

결국 반려동물 의료 접근성 문제는 단순히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공공의 과제다. 다만 그 해결책은 병원을 추가로 짓는 데 있지 않다. 이미 존재하는 병원들이 어디에 있고, 그 병원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되어 있는 의료 자원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현실에 맞고 지속가능한 접근이다. 공공과 민간, 복지와 의료가 협력해 하나의 전달 구조를 이루는 체계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구축해야 할 동물의료 전달체계이다.

반려동물 의료를 둘러싼 환경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수의사가 있어야 한다. 수의사는 단순한 서비스 제공자를 넘어 지역사회와 보호자, 지자체를 연결하는 조정자이자 설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앞으로의 동물의료는 더 이상 공급자 중심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형 공공, 사회적 기반 동물의료체계는 그 방향을 제시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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